울산동구민의 예술교육 나눔처 동구 문화원 입니다.
감목관 청사와 목마 성지를 관리했던 벼슬은 감목관으로 종 6품 관직에 소간 관원이다. 남목 감목관은 남목·염포·미포·명덕·전하·번덕·화정·방어진 일원, 등대산까지 관장하기 위해 휘하에 목 10인, 통인 4인, 사령 8인, 관노 10인, 목자군 393인이 있었고, 곡초 1,000다발 이상을 비축하고 말 300여필을 양마 하였다.
현재 남목 일원에는 감목관에 관련된 비석이 4곳에 보존되고 있고 그 중 2기이며, 이 목관비는 감목관 윤졸과 목관 변정엽의 선정비이다. 또한 이곳은 감목관 청사가 위치하였던 장소이기도 하다.
울산시 동구 일산동 출신으로 항일.노동운동 등에 나섰던 서진문(1903∼1928) 선생의 묘비
동구 일산동 출신으로 3.1운동이후 교육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사랑방에 청소년들을 모아놓고 가르쳐 오다가 학교를 세울 것을 결심하고 사재를 털어 이곳에 교육의 터를 마련하고 손수 땅을 고르고 건물을 지어 문맹을 퇴치하고 항일 구국운동에 기여하겠다는 일념으로 청소년들의 정신개발과 문자보급 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보성학교를 설립하셨다.
선생은 1925년 10월 울산 청년동맹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사회단체 정우회 울산지회 간부, 신간회 울산지회 서기와 사무 간사로 활동하면서 항일투쟁의 선두에서 농촌계몽과 항일정신 고취에 앞장선 지도자였으며 설립 후 약 9년간 8백여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자 일제는 1929년 3월 보성학교를 강제 해산 시켰다.
1931년경 주민들의 여론에 따라 성세빈, 성세륭 형제는 보성학교를 재 설립하여 1945년까지 울산지역 인재 수백명을 배출한 휼륭한 공로자였다. 또한 두 형제분은 울산 신간회 소속 위원으로 활동 하면서 이 고장 사학의 유지와 후진 양성 교육에 혁혁한 공을 남겨 그의 희생과 봉사 정신을 잊지 못하는 지역민과 제자들이 성금을 모아 송덕비를 세워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구 방어진 수산중학교를 설립한 이종산 선생의 공적비
교남지에는 조선시대 영남지방의 열녀 14명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중 월성 이씨는 헌종15년(1849) 이근영의 딸로서 울산군 동면 남목리에서 태어났다. 김해인 김재환이라는 청빈한 선비에게 시집을 갔으나, 과거 공부를 하던 남편이 알 수 없는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월성 이씨는 이때부터 간병에 정성을 다하고 백방으로 약을 구해 먹였으나 차도가 없고 점점 위중하여 사경에 이르렀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었으나 다시 깨어나지 못하고 향년 30세에 생을 마감하였다.
칡뿌리를 캐어 겨우 연명하면서도 삭망의 성묘 소분 등 모든 상례를 정성껏 치렀다고 한다. 마침내 이런 가상한 일들이 나라에 알려져 이씨는 광무 3년(1899) 2월 3일에 정부인에 가자되고 남편인 김재환은 이조참판의 벼슬에 증직 되었다. 나라에서는 \'부인의 정절\'을 기리기 위하여 표창하는 특별한 은전을 내렸고 1929년 많은 선비들이 뜻을 모아 표장비를 세웠다. 이 월성이씨 열행비는 울산광역시 동구 서부동 626-6번지 밭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관리를 용이하게 하기위해 2003. 5. 1일 현재 소재지 동구 서부동 522-1번지로 옮겨 놓았다.
울산광역시 동구 동부동 312번지 동부 시장옆 도로변에 있으며 임진왜란때 의병장 망조당 서인충공이 어린 시절부터 무술을 연마하던 장소였다. 서인충 공은 임진 왜란때 의병장으로 온산 덕신리 신밤전탄과 경주대본리 이견대 일원과 장기의 소봉대 등지에서 많은 공을 세웠고 대구 팔공산과 화왕산성의 곽재우 의병을 도와 왜적을 물리치는데 일조하였다.